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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블로그

AKB48 소개 및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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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일본어: エケビフォティエイト 에케비 훠티에이토[*], 한국어: 에이케이비 포티에이트)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프로듀스에 의해 2005년에 결성된 일본의 131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이다. 덴츠, 쿄라쿠 재팬, 돈키호테가 배후로 있으며 관동연합 출신 이사가 있다. 좁은 의미로는 일본 도쿄 도 아키하바라를 근거지로써 활동하는 동명의 그룹만을 지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나고야, 오사카, 규슈, 및 해외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화민국 타이페이 시,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시, 필리핀 마닐라, 태국 방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모든 자매 그룹까지 포괄적으로 지칭하며, 이 경우 대중 매체 등에서는 관습적으로 〈AKB48 그룹〉 혹은 〈48 그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2][3][4][5] 이곳에서는 좁은 의미의 AKB48 및 넓은 의미의 AKB48를 모두 다루고 있으며, 특히 넓은 의미의 AKB48의 경우에는 관습에 따라 〈AKB48 그룹〉이라 지칭한다.


AKB48는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주 1] 을 콘셉트로 하여 아키하바라의 AKB48 극장을 그들의 전용 극장으로 삼아 거의 매일 공연을 하고 있다. 이로써 대중 매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던 머나먼 존재였던 아이돌을 가까이에서 느끼도록 하며 팬들에게 그 성장 과정을 여과없이 공개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6]


2011년 및 2012년 연말에 발표된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에서는 그 해에 발표한 다섯 장의 싱글이 모두 1위부터 5위를 차지했으며, 이에 따라 제53회 및 제54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플라잉 겟"과 "한여름의 Sounds good !"으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였고, 그 이듬해 초에 열리는 제26회 및 제27회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에서도 2년 연속으로 국내 음악 부문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주 2] 를 수상하였다. 2013년 5월 22일에 발표된 31번째 싱글 "안녕 크롤"은 2013년 연간차트 기준으로 195만 5천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여름의 Sounds good !"이 기록한 182만 2천장을 뛰어넘는 자체 싱글 판매량 최고 기록이며, 1997년10월에 발매된 SPEED의 싱글 "White Love"가 기록하고 있었던 184만 5천장까지 뛰어넘으며 역대 여성 아티스트 단일 싱글 판매량 최고기록을 15년만에 경신하게 되었다.[9] 한편, 이에 앞선 5월 22일에는 전체 싱글 총 판매량으로 2185만 2천장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이때까지 하마사키 아유미가 가지고 있던 2141만 6천장을 뛰어넘는, 싱글 총 판매량 부문에서의 여성 아티스트 역대 최다 기록이다.[10]



명칭

그룹명 AKB는 홈그라운드가 위치한 지역 이름 아키하바라(AKIHABARA)에서 유래하였다. 본격적으로 모집을 할 당시에는 아키하바라48 프로젝트라 불렸고,[11] NTT 도코모의 협찬을 받은 멤버 모집 CM이나 인디즈 데뷔 당시의 각종 미디어에서는 Akihabara48라 불리었던 적이 있었다. 한편, 48는 결성 초창기 소속 사무소였던 office48의 사장 시바 고타로의 성씨인 〈시바〉에서 유래한 것[주 3][12] 이며, 멤버가 48명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AKB48 극장 지배인 도가사키 도모노부에 의하면, office48의 시바 고타로 사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가 48이므로 만약 50명 정도의 그룹을 만들 거라면 되도록 멤버 수를 48명에 맞추고 싶어했다고 한다.[12] 그룹 이름에 맞춰 초창기에는 1군으로 24명을, 2군으로 24명을 두어 모두 48명으로 멤버를 구성하려는 구상도 존재하였다.[13]


역사

2005-06 : 결성에서 메이저 데뷔까지

2005년 7월경 아키모토 야스시의 주도 하에 〈아키하바라 48 프로젝트〉[주 4] 제1기 멤버 모집이 시작되었다.[14] 한편 이 해 8월에는 전용극장 부지로서 돈키호테 아키하바라 지점 빌딩의 8층을 확정하였다.[15][16] 멤버 개개인이 조금씩 아이돌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그려가기 위해 연예계 경험자는 원칙적으로 배제하고자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초심자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15] 전 응모자 7924명 중 45명만이 서류심사를 통과하였는데, 이 45명이 이 해 10월 30일에 도쿄 도 미나토 구 시바우라 스튜디오에서 열린 최종 심사에 응시할 수 있었다.[17] 이 중 최종적으로 24명의 합격자가 추려졌는데, 경쟁률은 330대 1이었다.[14] 이 중 2016년 4월에도 계속하여 AKB48에 재적하고 있는 멤버는 코지마 하루나, 미네기시 미나미의 2명이다.[18]



결성 이래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 중심 멤버 미네기시 미나미

합격자 24명은 제1기 예비생으로서 이 해 11월 3일부터 도쿄 도내의 모 스튜디오에서 나츠 마유미의 지도로 댄스 및 보컬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15] 이 집중 특훈은 그로부터 약 1개월간 계속되었는데,[14] 이 과정에서 4명의 낙오자가 발생하였다.[주 5] 11월 23일부터는 적응 훈련을 위해 아직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던 AKB48 극장 스테이지로 장소를 옮겨 레슨을 이어나갔다.[19] 극장의 그랜드 오픈은 당초 12월 1일로 예정[20] 되어 있었으나, 아직 퍼포먼스 수준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예정일 며칠 전에 1주일 뒤로 연기한다[21] 는 발표가 있었다. 12월 7일에는 공개 리허설이 열렸고, 그 다음 날 AKB48의 첫 번째 극장공연이 열렸다. 이날 객석에는 72명이 모였는데, 이 중 65명이 극장 관계자였기 때문에 일반 관객은 단 7명 뿐이었다.[14]


초창기에는 AKB48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멤버들은 아키하바라의 팬티노출 집단[주 6] 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해야 했고, 항상 한 자릿수대의 관객 수를 참다 못해 극장 앞에서 헐값에 티켓을 나누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거의 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룹이 결성되고 나서의 첫 크리스마스 이벤트에서는 멤버들이 직접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기도 했는데, 전단지를 받은 이들이 그녀들이 보는 앞에서 버리고 가는 일도 있었다.[15] 그 와중에도 멤버들은 매일 관객이 조금씩이나마 늘어가는 공연을 거듭해 나갔으며, 이듬해 1월 6일에는 관객들의 의향에 따라 한달여 뒤 발표할 인디즈 데뷔 싱글의 곡을 "벚꽃의 꽃잎들"로 결정하였다.[주 7][22] 그로부터 2주일 가량이 지난 1월 22일에는 시노다 마리코가 가입하였다.[23] 그 며칠 후인 1월 25일에는 훗날 선발 총선거의 원형이 되는 인기 투표를 실시하였다. 이 무렵의 인기 투표는 극장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앙케이트를 실시하고, 이를 그 다음번 스테이지 멤버 구성에 참고하는 정도였다.[22]



인디즈 데뷔 싱글 발매기념 이벤트

그 며칠 후인 2월 1일에 인디즈 데뷔 싱글 "벚꽃의 꽃잎들"을 발표하였다. 그 사흘 뒤인 2월 4일에는 극장 공연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만원 관중을 기록하였고,[14]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관객들과 함께 "벚꽃의 꽃잎들"을 합창하였다.[22] 2월 19일에는 제2기 추가 멤버 오디션이 열렸는데, 2월 26일 발표된 합격자 19명으로 팀K가 결성되었다.[24] 이 중 2013년 6월에도 계속해서 재적하고 있는 이는 그 절반 가량인 아키모토 사야카, 우메다 아야카, 오오시마 유코, 코바야시 카나의 4명이며, 미야자와 사에는 SNH48로 완전 이적한 상태이다.[18] 팀K는 4월 1일부터 극장 공연을 시작하였다.[22] 공연 첫날에는 만원이었지만 3일째부터는 관객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24]


6월 9일에는 두 번째 인디즈 싱글 "스커트, 휘이익"으로 뮤직 스테이션 등에 출연하며 텔레비전에도 데뷔하였다.[24] 8월 22일에는 공식 팬클럽 〈기둥의 모임〉[주 8] 을 결성하였다.[24] 10월 25일에는 데프스타 레코드를 통해 메이저 데뷔 싱글 "만나고 싶었어"를 발표하였다. 11월 3일, 4일 이틀에 걸쳐, 도쿄 도 신주쿠 구에 있는 일본 청년관[주 9] 에서 첫 콘서트 〈퍼스트 콘서트 "만나고 싶었어: 기둥은 없다구!"〉[주 10] 를 열었다.[24]


그 사이에 제3기 추가 멤버 오디션이 있었고, 12월 3일에는 3기생 합격자 20명으로 팀B가 결성되었다.[24] 하지만 그 후 갑자기 사퇴자가 줄을 잇는 바람에 실제로 데뷔한 멤버는 13명 뿐이었고, 팀A로부터 우라노 카즈미, 와타나베 시호, 히라지마 나츠미의 3명의 멤버가 팀B로 긴급 수혈되기도 했다.[22] 이들을 제외한 팀B의 초대 멤버 13명 중,2013년 6월에도 계속해서 AKB48에 재적하고 있는 이는 그 절반 남짓한, 카시와기 유키, 카타야마 하루카, 다나베 미쿠, 와타나베 마유의 4명 뿐이며, 오오타 아이카는 HKT48로, 나카가와 하루카는 JKT48로 완전 이적한 상태이다.[18] 이로써 팀A, 팀K, 팀B의 3팀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는 2011년 팀4가 결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메이저 싱글 데뷔와 함께 AKB48의 활동은 초창기를 지나 본궤도에 올랐다.


2007-09 : "RIVER"의 첫 오리콘 1위


고하쿠 호빵

이듬해 3월 10일부터 4월 1일까지 도쿄, 나고야, 후쿠오카, 오사카에서 첫 전국 투어 〈봄날의 맛보기 전국 투어 - 아직 멀었어 AKB48!〉[주 11]를 가졌다.[25] 6월 3일에는 첫 여성 한정 공연을 펼쳤고, 공연이 끝나고 난 후 모든 여성 관객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이 날 이후로 매달 정기적으로 여성 한정 공연을 열기로 하였다.[25] 7월 20일에는 극장 공연 500회째를 맞아 멤버들이 그날의 극장 관객 모두에게 고하쿠 호빵[주 12] 을 직접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25][26]


9월 22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중 문화인 간담회 2007 - 오픈 칼리지 in 베이징[주 13] 에 아키모토 야스시가 팀B를 이끌고 참가하여 중국예술연구원에서 AKB48 최초 해외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모두 6곡을 선보였다.[27] 12월 31일에는 전차남 붐으로 인해 부각된 아키하바라 문화를 대표하여 나카가와 쇼코, 리아 디존과 한 조를 이루어 제58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였다. 이날 43명이 출연하였는데, 그때까지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단일 그룹으로서는 최다 인원이었다.[24] 하지만 당시에는 아키하바라의 오타쿠 대상 아이돌이라는 이미지만 강했을 뿐인데다가 실제 출연 시간도 1분 미만으로 짧아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28]


이듬해 1월 24일에는 지상파 첫 간무리반구미인 AKB1시59분!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 후 방송 시간이 1시간 앞당겨지며 AKB0시59분!이 되었다가, 더 인기를 얻게 되자 몇 달 후부터는 다시 30분 앞당겨지며 AKBINGO!가 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굳어지며 2013년에도 방송중이다. 2월에는 8번째 싱글 "벚꽃의 꽃잎들 2008"을 발표하였는데, 이 싱글의 판매에 있어서 심각한 트러블이 발생하였다.[주 14] 결국 이와 관련하여 데프스타 레코드사와의 계약은 파기되었고, AKB48는 그로부터 한동안 CD로서의 메이저 싱글을 발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6월 13일에 발표된 아홉번째 메이저 싱글 "Baby! Baby! Baby!"는 불가피하게 온라인 디지털 음원 형식으로 공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후에 킹 레코드와 새로이 계약을 맺게 되면서, 그 다음 싱글부터는 다시 CD 상태로서의 메이저 싱글을 발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룹 활동의 근간인 극장 공연만큼은 꾸준히 이어졌고, 5월 26일의 밤 공연으로 통산 1천번째 극장 공연을 기록하게 되었다.[29] 10월 22일에 킹 레코드에서의 첫 싱글이자 열번째 메이저 싱글 "큰 목소리 다이아몬드"를 발표하였다.



재팬 엑스포에서 공연중인 AKB48. 왼쪽부터 니토 모에노, 코바야시 카나, 키타하라 리에

이듬해 1월 31일에 엡손 시나가와 아쿠아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이벤트 아이돌 선수권 Push★1[주 15] 에서 아이돌링!!!과의 콜라보레이션 그룹 AKB 아이돌링!!![주 16] 이 데뷔곡 "뽀뽀하자구!"를 최초로 공개하였다.[30] 7월에는 제 10회 Japan Expo Paris 2009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유럽 공연을 가졌다.[31] 재팬 엑스포는 1999년부터 매년 프랑스 파리 교외의 빌팽트 전시회장에서 열린다. AKB48는 2일째인 7월 3일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32]


6월에서 7월 사이에 제1회 선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최종 개표 결과 발표는 7월 8일이었는데, 이 날 에이스 마에다 아츠코가 1위에 오르면서 이 해 8월 26일에 발표되는 13번째 싱글 "핑계 Maybe"의 센터 포지션을 획득하였다. 한편 8월 22일에서 23일 사이에 일본 무도관에서 AKB 104 선발 멤버 조각 축제[주 17] 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부 멤버들이 팀을 이동하는 한편 연구생들이 대거 정규 멤버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구성된 각 팀에는 캡틴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팀A에서는 다카하시 미나미, 팀K에서는 아키모토 사야카, 팀B에서는 카시와기 유키가 각각 캡틴으로 지명되었다. 9월 25일부터 이틀간 미국 뉴욕의 제이컵 K. 재비츠 컨벤션 센터에서 뉴욕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는데, AKB48는 이곳에 특별 음악손님(Special Musical Guest)으로서 초대되었다.[33]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인 10월 5일부터 이틀간 프랑스 칸 영상 콘텐츠 박람회 2009(Mipcom 2009)이 개최되었는데, 이곳에 아키모토 야스시와 함께 초대되어 미니 콘서트를 펼쳤다.[34][35]


10월 21일에는 14번째 싱글 "RIVER"를 발표하였다. 11월 21일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서 일본 아티스트 부문 아시안 레코멘드 상을 수상하였다. 다만 제반 사정상 시상식 회장에는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그 대신 일본 도쿄 도 치요다 구의 마루노우치 빌딩 1층 MARUCUBE에서의 위성 생중계[주 18]를 통해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RIVER"를 선보였다.[38][39][40][41] 이틀 후인 11월 23일에는 아키모토 야스시와 AKB48의 멤버들이 함께 진행한 라디오 공개생방송에서 제60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이 확정되었음이 발표되었다. 2007년에는 일명 아키하바라 문화의 이름으로 다른 아키하바라 아이돌들과 한 조를 이루어 참가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단독 자격으로서의 참가였기 때문에 그 의미는 많이 달랐다.[15] 이 해부터 홍백가합전 참가 멤버 전원의 매스게임식 인간 문자가 항례적으로 행해지게 되었고, 이 해에 만들어진 인간 문자는 홍V[주 19] 였다.


2010 : "헤비 로테이션", "Beginner"


오오시마 유코

이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제2회 선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여기서 오오시마 유코가 에이스 마에다 아츠코를 꺾고 1위에 오르며 첫 센터 포지션을 획득하였다. 이 무렵부터 각종 매스컴에서 오시마를 마에다와 같은 반열의 일명 투톱으로 분류하기 시작하였다.[42] 오시마가 처음으로 센터 포지션을 맡은 싱글 "헤비 로테이션"은 이 해 8월 18일에 발표되었는데, 이 곡은 이 해 11월 1일부터 이듬해 9월 26일까지 오리콘 노래방 선곡 랭킹에서 48주 연속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잠깐 연속 기록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2012년 6월 8일에는 통산 81주 1위를 기록하며 일본 신기록을 세우게 되었다.[43]


이 해 7월 1일부터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엑스포 2010(Anime Expo 2010)에 스페셜 드림 앰버서더로서의 명예 게스트(Guest of Honor-Special Dream Ambassadors)로서 초대되어, 첫날인 1일에 노키아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44] 이 해 8월 31일에는 공식 팬클럽 〈기둥의 모임〉을 2011년 9월 부로 폐지한다고 발표하였다.[45] 이에 따라 9월 30일부터는 〈기둥의 모임〉의 신규 가입 및 기간 갱신 접수를 종료하게 되었다.[45][주 20] 9월 21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제1회 가위바위보 대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우치다 마유미가 우승을 거두며 첫 센터 포지션을 획득하였다. 그녀가 센터가 된 19번째 메이저 싱글 "찬스의 차례"는 이 해 12월 8일에 발매되었다.


10월 22일에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의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G20 기념 제7회 아시아 송 페스티벌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며,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국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 참가한 멤버는 팀A에서 이와사 미사키, 오오타 아이카, 쿠라모치 아스카, 사시하라 리노, 마츠바라 나츠미, 팀K에서 키쿠치 아야카, 니토 모에노, 후지에 레이나, 마츠이 사키코, 요네자와 루미, 팀B에서 이시다 하루카, 키타하라 리에, 사토 스미레, 사토 나츠키, 마스다 유카, 미야자키 미호의 16명이었다.[46] 이들은 이 공연에서 "말총머리와 머리끈", "만나고 싶었어", "헤비 로테이션"의 3곡을 선보였다.[47][48] 10월 24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선수이부[주 21] 의 쇼핑몰 드래건 센터에 AKB48 오피셜 삽 홍콩을 오픈하였다.[49] 한편 2010년 12월 1일부터는 코즈웨이 베이의 타임스 스퀘어 앞에 AKB48 뮤지엄 홍콩도 오픈하였다.[50]


10월 27일에는 18번째 메이저 싱글 "Beginner"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하였다. 11월 12일에는 싱가포르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아시아(Anime Festival Asia)에서, 11월 16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마카오에서의 KYORAKU presents AKB48 · SKE48 라이브 인 아시아에서 공연을 가졌다. 한편 11월 18일에는 기네스 세계 기록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멤버 수가 많은 팝 그룹〉(Largest Pop Group)[주 22] 으로 인정받았고,[51] 11월 20일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재팬 팝-컬처 페스티벌 2010(Japan Pop-Culture Festival 2010)에서 공연을 가졌다.[52] 이 해의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에서는 "Beginner"와 "헤비 로테이션"이 각각 1위와 2위에 올랐다.[53] 12월 31일에는 제61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였다. 이 때는 연구생과 SKE48, NMB48[주 23] 의 멤버까지 포함되었고, 한 그룹의 명의로서 사상 최다인 130명이 출연하였다. 이 해의 인간 문자는 〈AKB〉였다.


2011 : "플라잉 겟"과 국민 아이돌


마에다 아츠코

이듬해 1월 10일에 발표된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서는 상위 10위 곡 중 네 곡이 AKB48의 곡이었다. 더구나 이 상태는 이후 3주간 이어졌고, 이것은 오리콘 차트가 집계되기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54] 그로부터 열흘 쯤 후인 1월 22일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AKB48: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공개되었다.[55]


3월 11일 오후 2시경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대중교통이 마비되었고 극장의 안전 점검 또한 시급했기 때문에,[56] 그날로 예정되어 있던 SDN48의 극장공연[57] 및 3월 28일까지의 AKB48 극장에서의 모든 공연이 중지되었다.[58] 3월 14일에는 리소나 은행 시부야 지점과 미쓰비시 도쿄 UFJ 은행 고탄다 지점에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이재민을 위한 의연금 접수 계좌를 열었고,[59] 그 다음날 15일에는 두 계좌에 모두 5억 엔을 기부한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60] 이어 3월 26일과 27일에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해 취소되었던 콘서트 〈다카미나를 따르겠습니다〉[주 24][61] 을 대체하여 그 콘서트 회장이었던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누군가를 위해서' 채리티 이벤트〉[주 25] 를 개최하였다. 3월 29일에는 그때까지 가칭 〈AKB48 프로젝트〉로 불리고 있었던 채리티 프로젝트의 명칭을 〈'누군가를 위해서' 프로젝트〉[주 26][62] 로 확정하고, 그 활동의 일부로써 5월 25일에 발매하는 21번째 싱글 "Everyday, 카츄샤"와 그 이후에 발표하는 싱글들의 수익 일부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의연금으로 기부하기로 하였다. 4월 1일에는 팀A의 3rd Stage 공연곡 중 "누군가를 위해서 -What can I do for someone-"를 재녹음한 디지털 음원을 발표하였다. 이 디지털 음원 판매로 인한 모든 수익은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이재민들에게 전액 기부된다.[63]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여파가 점차 가라앉을 무렵인 5월에서 6월에 걸쳐 제3회 선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여기서 마에다 아츠코가 디펜딩 챔피언 오오시마 유코를 꺾고 1위에 올라 센터 포지션을 탈환하였다. 이에 의한 싱글 "플라잉 겟"은 8월 24일에 발표되었는데, 8월 23일에 발표된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에서 102만 6천여장을 판매한 것으로 발표되며,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집계 사상 최초로 발매 첫 날에 밀리언셀러를 달성하였다.[64] 발매 첫 주에는 135만 4천장을 판매하였다.[65] 5월 14일에는 싱가포르의 쇼핑몰 〈*SCAPE MALL〉 내에 AKB48 오피셜 삽 싱가포르를 열었고, 병설 AKB48 카페도 함께 개업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AKB48 시어터 싱가포르에서 일본 국외에서는 처음으로 정기공연이 시작되었다. 6월 6일에는 정규 멤버로 승격한 이후에도 잠시 연구생 팀에 배속되어 있던 10명의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팀4가 결성되었다. 팀4는 10월 10일에 첫 극장 공연을 가졌다. 또한 9월 20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제2회 가위바위보 대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시노다 마리코가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센터 포지션을 획득하였다. 그녀가 센터 포지션을 맡은 24번째 싱글 "위에서부터 마리코"는 12월 7일에 발매되었다. 7월 23일에는 중화민국 타이페이 시 완화 구 시먼띵[주 27] 의 패션 빌딩 〈청핀 116〉[주 28] 3층에 AKB48 오피셜 삽 타이페이를 오픈하였다. 이후 10월 20일에는 AKB48 카페를 병설 개업하였다.[66]


10월 26일에는 23번째 싱글 "바람은 불고 있어"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10월 25일에 발표된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에서 전작 "플라잉 겟"을 제치고 104만 6천장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67] 또한 이 싱글 발매 시점에서 싱글 CD의 총 누적 판매량이 1034만장에 이르렀고, 이로써 일본 여성 그룹으로서는 네 번째로 누적 판매량 1천만장을 돌파하게 되었다.[68]11월 22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시에 AKB48 오피셜 삽 상하이를 오픈하였다. 9월 30일에는 공식 팬클럽 〈기둥의 모임〉이 해체되었다.[45] 그를 대신하여 12월 8일에 새로운 공식 팬클럽 〈두 기둥의 모임〉[주 8]이 결성되었으며,[69] 같은 날에는 구글과의 협력에 의해, 구글 플러스의 플랫폼을 이용한 AKB48 그룹 멤버와 팬의 교류 서비스 〈AKB48 on Google+〉의 스타트가 발표되었다.[70]


12월 19일에 오리콘에 의해 발표된 제44회 연간 랭킹 2011에서, 그 해에 발표한 5장의 싱글이 1위부터 5위까지를 나란히 기록하였다. 연간 CD, DVD, 블루레이의 총 판매량은 891만 1천장으로, 모두 162억 8천만 엔의 수익을 냈다. 연간 총 판매액 1위를 기록한 가수에게 수여되는 아티스트별 토털 세일즈 상을 데뷔 6년만에 처음으로 수상하였고, 오리콘에서 집계하는 16부문 중 역대 최다인 7개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7] 12월 30일에는 제53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플라잉 겟"으로 처음으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12월 31일에는 제62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였는데, 모두 210명이 출연하면서 전년도에 세웠던 최다인원 출연기록을 이 해에 또 다시 갱신하였다. 이 해의 인간 문자는 힘내자 일본!![주 29] 이었다.


2012 : 1830m 지점에서

이듬해 1월 27일에는 두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Documentary of AKB48: Show must go on 소녀들은 상처받으며 꿈을 꾼다〉가 개봉하였고,[71] 2월 15일에는 25번째 싱글 "GIVE ME FIVE!"를 발표하였다. 이 싱글로써 누적 판매량은 1315만 5천장이 되었다. 이는 모닝구무스메의 1180만 8천장을 넘는 역대 1위의 기록이었으며, 이로써 총 판매량, 첫주 최다 판매량, 통산 밀리언셀러 횟수, 연속 밀리언셀러 횟수, 통산 위클리 1위 등극 횟수, 연속 위클리 1위 등극 횟수 등 여섯 부문에서 통산 1위를 기록하게 되었다.[72] 이 무렵부터는 대중 매체로부터 AKB 현상, 일본 총 AKB화 또는 국민 아이돌[주 30] 이라고 불릴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하였다.[15]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콘서트 〈업무연락. 부탁하네, 가타야마 부장! in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주 31] 를 개최하였다. 콘서트 첫날에는 도쿄 돔 콘서트 개최가 발표되었고,[73] 둘째 날에는 26번째 싱글로 발매될 "한여름의 Sounds good!"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74] 또한 당시 시점까지 11명이 소속돼 있던 팀4에 다섯 명의 연구생이 승격되어 16명을 채운다는 것이 발표되었으며, SKE48 팀S 소속의 마츠이 쥬리나가 AKB48의 팀K에, NMB48 팀N의 와타나베 미유키가 AKB48의 팀B에 기간 한정으로 겸임을 한다는 사실도 발표되었다. 아울러 가까운 시일 내에 팀8이 결성된다는 사실도 발표되었다.[75] 마지막 날에는 에이스 마에다 아츠코가 돌연 졸업 선언을 하였다.[76][77][주 32]


3월 30일에는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도쿄 돔 개막전에서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제창하였다.[79] 그리고 4월 4일에는 마에다 아쓰코의 제4회 선발 총선거 불출마 선언이 있었다. 한편 5월 23일에는 26번째 싱글 "한여름의 Sounds good!"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발매 첫 주에만 161만 7천여장이 팔리면서 일본의 역대 발매 첫 주 싱글 최다 판매 신기록을 세웠다.[80]


6월 6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제4회 선발 총선거가 개최되었다. 마에다 아츠코는 졸업을 앞두고 있어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다만 오오시마 유코가 전년도 5위에서 순위가 급상승한 차기 에이스 후보 와타나베 마유를 3만표 이상의 격차로 2위에 머무르게 하고 역대 두 번째로 1위에 오르면서 건재를 과시하였다.[81] 이 해에는 처음으로 후지 TV를 통해 지상파 특별 생방송으로서 AKB48 제4회 선발 총선거 생방송 스페셜[주 33] 이 편성되었다. 본사 스튜디오에서 두 명의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고, 일본의 유명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게이오기주쿠 대학 특임교수,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마에다 아츠코 등이 그 게스트로서 출연하였다. 평균 시청률은 18.7%이었고, 순간 최고 시청률은 28%였다.[주 34][82] 다만 후지 TV의 이 선발 총선거 생방송은 졸속 편성으로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프로야구 중계와도 같이 행사가 언제 끝날 지 예측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오후 7시 시작 이후 무조건 2시간 동안만 편성한 후에 강제로 생방송을 끝내 버린 것이다. 스포츠 중계처럼 방송 시간을 연장하거나 하면서 편성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에 이는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후지 TV가 생방송을 종료한 오후 9시 9분은 1위에 오른 오오시마 유코가 한창 소신표명 연설을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83]



도쿄 돔의 야경

8월 15일에는 네 번째 정규 앨범 1830m를 발표하였으며, 8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는 7년간 목표로 해 왔던 도쿄 돔 콘서트를 가졌다. 첫 날인 24일에는 팀 재편성이 있었다. 그룹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이다. 전 해 6월에 결성되었던 팀4를 해체하여 팀A, K, B의 3팀 체제로 회귀하고, 팀A에 22명, 팀K와 B에는 23명을 소속시켰다. 이 날 많은 연구생이 정규 멤버로 승격되었으며, 6월 24일에 정규 멤버로 승격된 이즈타 리나, 코지마 나츠키, 코바야시 마리나, 나토리 와카나, 후지타 나나, 모리카와 아야카의 6명의 연구생[84] 도 정식으로 소속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 유학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를 근거지로 하는 SNH48에 미야자와 사에와 스즈키 마리야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근거지로 하는 JKT48에 다카죠 아키와 나카가와 하루카가 이적하게 되었다. 또한 멤버 다카하시 미나미가 그룹 총감독(General Manager)에 임명되었다. AKB48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자매 그룹이 점차 생겨나서 전체 그룹 구성원이 200명을 넘기 시작했는데, 콘서트 등에서 이들을 모두 통제할 최고 리더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이 경우 AKB48 팀A의 캡틴 다카하시 미나미가 암묵적인 리더가 되어 모든 그룹 구성원들을 이끌어왔다. 이러한 그녀에게 그룹 총감독이라는 직책이 새로이 맡겨졌고, 그때까지 그녀가 맡고 있던 팀A의 캡틴 자리는 시노다 마리코에게 맡겨졌다. 그와 동시에 팀K의 캡틴은 아키모토 사야카에서 오오시마 유코로, 그리고 팀B의 캡틴은 카시와기 유키에서 우메다 아야카로 인사 이동이 단행되었다.[85]


8월 27일에는 팀A의 마에다 아츠코가 AKB48 극장에서 행해진 졸업 공연으로 AKB48를 졸업하였다. 아키하바라 AKB48 극장에서 도쿄 돔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18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AKB48는 도쿄 돔 콘서트를 갖게 되기까지 데뷔하고부터 2087일이나 걸렸다. AKB48 공식 블로그의 타이틀 또한 〈AKB48 Official Blog ~TOKYO DOME까지의 궤적~〉이었을 정도로 도쿄 돔 콘서트는 AKB48의 하나의 종착점이자 동시에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도쿄돔 콘서트 및 에이스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을 계기로 AKB48 활동사의 제1장이 끝나고 제2장의 막이 오른 것과 같았다.[86] AKB48 공식 블로그 또한 그 타이틀을 7년만에 〈AKB48 Official Blog~1830m부터~〉로 변경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9월 18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제3회 가위바위보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시마자키 하루카가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87] AKB48가 인디즈 데뷔를 한 이래 27번째 메이저 싱글까지 모두 29장의 싱글이 발표되었는데, 이 모든 싱글 타이틀곡에 선발로 뽑힌 멤버로는 코지마 하루나가 유일했다. 이날 대회에서도 85강전과 64강전을 내리 이기고 32강에 진출하여 우메다 아야카와 만났다. 여기서 승리하여 16강에 진출한다면 선발 멤버가 될 수 있었지만, 고지마는 여기서 우메다에게 패하면서 연속 싱글 선발 기록을 30에서 멈취야 했다.[87] 챔피언 시마자키 하루카가 센터 포지션을 맡는 29번째 싱글 "영원 프레셔"는 12월 8일에 발매되었다. 이 싱글은 초동 판매량 107만 3천장을 기록하며, 초동 판매량만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통산 11회 및 연속 10회의 밀리언셀러 기록을 달성하였다. 연속 10회 밀러언셀러 기록은 B'z와의 타이 기록으로 16년만에 나온 기록이며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한편 11회의 통산 밀리언셀러 달성 기록의 경우 Mr.Children의 통산 10회를 뛰어넘는 기록이며, B'z의 통산 15회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영원 프레셔는 첫 주 판매량만으로 2012년 연간 차트 5위에 올랐고, 이로써 AKB48의 싱글은 사상 최초로 2년 연속으로 1위부터 5위까지를 독점하게 되었다.


10월 31일에는 29번째 싱글 "UZA"가 발매되었다. 이 곡은 발매 3일만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였고, 발매 첫주의 11월 12일부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AKB48의 싱글 1위 획득은 모두 15회 연속이자 통산 15회가 되었다. AKB48의 싱글이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것은 9회 연속이자 통산 10회이고, 이 달성에 의해 AKB48는 연속 밀리언셀러 달성 기록에서 Mr. Children의 8회 연속 기록을 제치고 단독 2위가 되었다.[주 35] 통산 10회 밀리언 달성은 B'z, Mr.Children에 이은 사상 세 번째의 기록으로,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최초이다. 이때까지의 오리콘 차트의 싱글(디지털 싱글 이외), 앨범의 총 판매량에 있어서의 여성그룹 역대 1위는 SPEED의 1954만 6천장이었다. 그러나 11월 12일부의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의 집계로 AKB48의 통산 누적 판매량은 2천만장을 돌파하면서 역대 여성 아티스트 1위가 되었다.[88]


11월 1일에는, 앞선 도쿄 돔 콘서트에서 발표된 팀 재편성에 의한 신 체제가 출범하였다.[89] 12월 30일에는 제 54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싱글 "한여름의 Sounds good!"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2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2년 연속 대상 수상은 통산 여섯번째의 기록이며, 여성 그룹으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다.[90] 12월 31일에는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이자 통산 다섯 번째로 출연하였다. 이 날에는 전년도의 210명보다 40명이 적은 170명만이 출연하였다. 이 해의 인간 문자는 배치 전환을 이용한 2단 문자로서, '일본 라라라'에 이은 '힘내자'였다. 특히 이 해에는 SKE48가 AKB48와는 별도로 단독 명의로 출연하여, 히트곡 "파레오는 에메랄드"를 선보이기도 하였다.[91]


2013 : "안녕 크롤"과 함께 새로이 부는 바람

이듬해 1월 31일에는, 이날 발간된 〈주간 문춘〉2013년 2월 7일호에 핵심 멤버 미네기시 미나미의 섹스 스캔들이 보도되었다.[92] 이에 미네기시 미나미는 유튜브의 AKB48 공식채널을 이용하여, 스스로 삭발을 한 채 눈물을 흘리며 사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더불어 미네기시 미나미는 2월 1일부로 연구생으로 강등되었다. 그룹 자체적으로는 2009년 1월경의 사오토메 미키 이후 4년만에 있는 일이었다.[93][94] 한편, 미네기시 미나미의 삭발 사죄 동영상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어서, 영국의 BBC[95], 미국의 CNN[96], 미국의 데일리 뉴스[97], 영국의 가디언[98], 미국의 ABC[99], 캐나다의 글로브 앤 메일[100], 싱가포르의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101], 스위스의 르 마탕[102], 레바논의 로리앙 르 주르[103] 페루의 라디오 프로그라마스 델 페루[104], 브라질의 G1 (헤디 글로보)[105], 중국의 환구시보[106], 스웨덴의 아프톤글라데트[107],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 뉴 에이지[108], 독일의 슈피겔[109], 카타르의 알 자지라[110] 등의 세계적 미디어들이 미네기시 삭발 사죄 소동을 보도하였다.


다음 날 2월 1일에는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DOCUMENTARY of AKB48 - No flower without rain -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서 무엇을 보는가"가 공개되었다. 1월 31일에 사전 상영된 이 영화의 극중에서, 핵심 멤버 이타노 토모미는 인터뷰를 위해 앉아 있었는데, 촬영 스탭에게서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AKB48 졸업에 관한 이미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 영화가 2월 1일 공개인가요 음, 저는 내년에 AKB48를 졸업합니다. 아, (2013년)2월에 공개되는 거라면 올해라고 해야 맞겠군요." 라며 돌연 졸업을 선언하였다. 그녀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며, 영화 극중에서도, 영화 상영에 이어진 무대 인사에서도 담담하게 심경을 밝혔다.[91]


2월 20일에는 30번째 싱글 "So long!"이 발매되었다. 이는 3월 4일에 발표된 오리콘 위클리 랭킹에서 1위에 오르며, RIVER 이후 17연속 오리콘 위클리 차트 1위에 올랐다. 또한 초동 판매량 103만 6천장으로서, 10연속 첫 주 밀리언셀러의 기록을 이어갔다.[111] 한편 5월 22일에는 31번째 싱글 "안녕 크롤"이 발매되었는데, 이는 첫 날 판매량만으로도 이때까지 자신들의 싱글 "한여름의 Sounds good!"이 기록한 2012년 5월 22일자의 117만 1천장을 훨씬 뛰어넘는 145만 1천장을 기록하여 역대 첫날 판매량 1위 기록을 1년 만에 다시금 스스로 경신하였다.[10] 한편 6월 3일자의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에서도 1위에 올라, RIVER로부터 18연속 1위에 올랐으며, 초동 판매량은 176만 3천장이 되며, 전년도에 발매된 "한여름의 Sounds good!"이 가지고 있었던 초동 판매량 역대 최고기록이었던 161만 7천장 또한 스스로 경신하였다. 또한 전체 싱글 누계 판매량이 모두 2185만 2천장이 되어, 이때까지 하마사키 아유미가 가지고 있던 2141만 6천장을 뛰어넘었고, 이로써 여성 아티스트로서는 역대 최다의 누계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10] 그 다음주의 6월 10일자 오리콘 위클리 차트에서는 10만 9천장을 판매하며 3위에 올랐는데, 이로써 "안녕 잘가 크롤"의 총 판매량은 187만 2천장이 되어 "한여름의 Sounds good!"이 기록한 182만 2천장을 뛰어넘어 자체 싱글 최고 판매량을 경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97년 10월에 발매된 SPEED의 싱글 "White Love"가 기록하고 있었던 184만 5천장을 뛰어넘으면서 여성 아티스트 싱글 판매량 역대 최고 기록을 15년만에 경신하게 되었다.[9]


6월 8일에는 요코하마 국제 종합 경기장에서 "AKB48 슈퍼 페스티벌"이 열렸고, 그 2부 행사로서 "AKB48 32nd 싱글 선발 총선거 ~꿈은 혼자서는 꾸지 못해~"가 개최되었다. 이 해의 선발총선거에서, HKT48의 사시하라 리노가 디펜딩 챔피언 오시마 유코를 꺾고 1위에 올랐다. 이제까지의 선발총선거 1위는 마에다 아츠코와 오오시마 유코만이 기록하고 있었다. 더구나 AKB48 그룹의 종주 그룹 격인 AKB48 소속이 아닌 자매그룹 소속 멤버가 1위에 올랐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전년도 선발총선거에까지 선발 멤버를 배출하지 못했던 NMB48에서도 투톱 에이스 야마모토 사야카와 와타나베 미유키를 각각 14위와 15위에 들이며, 16위까지의 선발 멤버를 처음으로 배출하였고, SKE48에서도 투톱 에이스 마츠이 쥬리나와 마츠이 레나를 각각 6위와 7위에 올린데다가, 스다 아카리를 16위에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전년도 가위바위보 대회 챔피언으로서 "영원 프레셔"의 센터 포지션을 맡으며 차세대 에이스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시마자키 하루카가 12위에 오르며, 세대 교체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한편, 이 날 전년도와 같은 5위에 오른 시노다 마리코가, 수상 소신표명에서 돌연 졸업을 선언하였다. 이 해의 7월과 8월에는 후쿠오카 돔, 삿포로 돔, 교세라 돔, 나고야 돔, 도쿄 돔의 일본 5대 돔 투어가 계획되어 있다.


AKB48 그룹의 운영 방식

멤버 선발 이벤트

AKB48 그룹의 종주 그룹 격인 AKB48는 그 정규 멤버 수가 60여명 정도이며, SKE48, NMB48, HKT48와 같은 AKB48 그룹의 다른 계열 그룹까지 모두 합하면 멤버 수는 200명 가량이 된다. 그 중, AKB48의 싱글에 참가하는 것은 20명 남짓의 정예 멤버들이다. 보통은 아키모토 야스시 프로듀서가 전권을 가지고 선발 멤버를 결정하지만, 1년에 두 번은 팬들에 의해서, 그리고 멤버들 자신에 의해서 선발 멤버가 결정되고 있다. 전자는 선발 총선거이고, 후자는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이다. 비록 AKB48만의 싱글이지만, 이러한 이벤트에는 SKE48, NMB48, HKT48와 같은 (최소한 일본 국내의) AKB48 그룹의 다른 자매 그룹도 참가하고 있다.


선발 총선거는 매년 하나의 싱글에 참가하는 멤버를 팬들의 투표로 선발하는 제도이다. 거의 프로듀서의 의향만이 반영되는 선발 제도에 불만이 속출하자 도입된, 팬에 의한 인기 투표이며 팬에 의해 선발 멤버가 선출되는 연중 유일한 기회이다.[15] 선거권은 총선거 직전에 발매된 싱글 CD를 구입한 사람과 공식 팬클럽 회원, 아이폰·안드로이드 공식 애플리케이션의 유료 회원에게 부여된다. 피선거권은 AKB48 그룹의 모든 구성원, 즉 AKB48 및 모든 자매 그룹의 정규 멤버와 연구생들에게 부여된다.[주 36] 선거 운동 기간에는 참가 멤버 전원의 선거 포스터가 제작되어 지정된 장소에 부착되고, 정견 방송 또한 유튜브의 선거 운동용 기간 한정 채널 등에서 정확히 공평하게 공개된다.[15]


지금까지 시행된 선발 총선거는 이하와 같다.


2009년 : AKB48 13th 싱글 선발 총선거 〈하느님께 걸고 진짜입니다〉 (AKB48 13thシングル選選「神に誓ってガチです」)

2010년 : AKB48 17th 싱글 선발 총선거 〈어머니를 걸고, 진짜입니다〉 (AKB48 17thシングル選選「母さんに誓って、ガチです」)

2011년 : AKB48 22nd 싱글 선발 총선거 〈올해에도 진짜입니다〉 (AKB48 22thシングル選選「今年もガチです」)

2012년 : AKB48 27th 싱글 선발 총선거 〈팬이 정하는 64의석〉 (AKB48 27thシングル選選~ファンが決める64議席~)

2013년 : AKB48 32nd 싱글 선발 총선거 〈꿈은 혼자서는 꾸지 못해〉 (AKB48 32thシングル選選~夢は1人じゃ見られない~)

2014년 : AKB48 37th 싱글 선발 총선거 〈꿈의 현재 지역 경쟁자는 어딨어〉 (AKB48 37thシングル選選~夢の現在地ライバルはどこだ~)

2015년 : AKB48 41st 싱글 선발 총선거 〈순위 예상 불가능, 거친 하룻밤〉 (AKB48 41stシングル選選~順位予想不可能、大荒れの一夜~)

2016년 : AKB48 45th 싱글 선발 총선거 〈우리는 누구를 따라 가면 좋을까〉 (AKB48 45thシングル選選~僕たちは誰について行けばいい~)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는 선발 총선거와 더불어, 팬들의 목소리에 의해 창설된 선발 멤버 선출 이벤트이다. 지명도나 실적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가위바위보 토너먼트 대회의 결과만으로 선발 멤버가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멤버들에게 찬스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6]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는 단판제 승부의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회장의 스테이지에는 전용 테이블이 있고, 그 뒤에 한 명의 심판이 서 있다.[주 37] 그리고 부정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네 명의 부심이 주위에 앉아 있다. 이후 두 명의 대전자의 이름이 이종격투기 K-1에서처럼 차례로 호명된다. 그와 함께 심판 앞에 마주서면, 간단히 악수를 한 후에 서로가 승부수로 사용할 손의 주먹을 테이블 위에 맞대고 있으며, 그 후 심판과 관객이 일제히 〈가위 바위 보!〉(じゃんけんぽん! 잔켄폰![*])라는 구호를 외침과 동시에 승부수를 낸다. 만약 비겼을 경우에는, 〈보〉(あいこでしょ 아이코데쇼[*])라고 하면서 승부가 갈릴 때까지 연이어 승부수를 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와는 달리, 한 템포 쉬고 난 후 다시 테이블 위에 주먹을 맞대고 심판과 관객의 구호를 기다려야 한다.[6]


지금까지 실시된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는 이하와 같다.


2010년 : AKB48 19th 싱글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 (AKB48 19thシングル選じゃんけん大)

2011년 : AKB48 24th 싱글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 (AKB48 24thシングル選じゃんけん大)

2012년 : AKB48 29th 싱글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 (AKB48 29thシングル選じゃんけん大)

2013년 : AKB48 34th 싱글 선발 가위바위보 대회 (AKB48 34thシングル選じゃんけん大)

2014년 : AKB48 그룹 가위바위보 대회 2014 ~주먹으로 쟁취! 1/300 솔로 데뷔 쟁탈전~ (AKB48グルプじゃんけん大2014 ~拳で勝ち取れ!1/300ソロデビュ奪~)

2015년 : 제6회 AKB48 그룹 솔로 싱글 쟁탈 가위바위보 대회 in 요코하마 아레나 ~이런 곳에서 운 같은걸 써버리는 걸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기지 않으면 어쩔 수 없잖아 (第6回AKB48グルプ ソロシングル奪じゃんけん大in浜アリナ ~こんなところで、運なんか使っちゃうのかと思うかもしれないが、とりあえず、勝たなきゃしょうがないだろ?~)

2016년 : AKB48 그룹 유닛 싱글 쟁탈 가위 바위보 대회 in 고베 월드 기념 홀 (AKB48グルプ ユニットシングル奪じゃんけん大in神ワルド記念ホル)

악수회

AKB48 그룹은 그 CD를 구입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악수회를 실시하고 있다. 악수회는 팬들이 멤버와 악수와 함께 짧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로서의 콘셉트를 충족시켜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AKB48 그룹 중 AKB48가 결성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 날 갑자기 음향기기가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극장 공연이 불가능해졌다. 그에 따라 관객들에의 보상 조치로서 부랴부랴 악수회가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고, 이는 훗날 AKB48가 일정 수준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이후에 다시 응용되어, AKB48뿐만 아니라 AKB48 그룹을 구성하는 모든 자매그룹들도 매번 새로운 CD를 발매할 때마다 정기적으로 악수회를 실시해오는 계기가 되었다.[14]


악수회에는 〈전국 악수회〉와 〈개별 악수회〉가 있다. 〈전국 악수회〉는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는 악수회로, 참가권은 통상반[주 38] 싱글 CD에 들어 있다. 다소의 사전 행사가 있은 후에 악수 이벤트가 진행된다. 우선 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수권을 정리권으로 바꾼 후, 악수하고 싶은 멤버의 줄에 선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악수할 시간은 거의 없어서, 아예 싱글을 여러 장 구입해서 악수권을 여러 장 확보해 둔 후에, 그것을 한 장씩 써가면서 몇번이고 다시 줄을 서는 팬도 적지 않다. 〈개별 악수회〉의 참가권은 극장반[주 39] 싱글 CD에 들어 있고, 기본적으로 간토 지방에서 실시되는 악수회이며, 〈대악수회〉라 불리는 경우도 많다. 〈전국 악수회〉보다 악수할 수 있는 시간이 길고, 또한 악수 한번에 한 장씩만 사용할 수 있는 전국 악수회와는 달리 동시 세 장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악수할 수 있는 시간을 길게 확보할 수 있다.[112]


마케팅과 활동 전략


경기 불황에도 안정적인 티켓 마케팅 전략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장기 불황과 취직난을 겪어야 했고, 자연스럽게 인터넷 등과 같이 기회비용이 적은 취미에 몰두하는 것과 같은 소비양식을 취하게 되었다. 작가 하야미즈 겐로는 이러한 경제상황에 적용하여 생겨난 문화를 〈디플레 컬쳐〉라 명명하였다.[113] 경제학자 다나카 히데토미에 의하면, AKB48는 불황 하에서도 끄떡없는 디플레 컬처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 문제 등으로 음악 CD의 판매량이 급락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라이브를 통해 수익금을 확보하는 것이 제이팝 음악 업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 때문에 콘서트 입장 요금은 항상 비싸게 책정되기 일쑤였는데, AKB48의 극장 공연 티켓만은 (한 번 인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아티스트의 라이브에 비교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또한 사진집과 같은 관련 상품의 가격도 평균 이하로 설정되어 있다. 다나카 히데토미는 이것을 수입이 적은 젊은 아이돌 오타쿠를 타겟으로 한 마케팅 전략으로 보고 있다.[114]


또한, AKB48의 멤버 중 많은 이가 블로그(또는 트위터)를 개설하고 있고, 팬들은 그것을 체크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지출을 하지 않는 소비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디플레 컬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이를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마음 속의 소비〉라 부르고 있는, 돈을 쓰지 않는 비경제적 활동의 하나로도 볼 수 있다.[115]


경제학자 가네코 마사루는, AKB48의 비지니스 모델은 저렴한 가격 정책 유지를 위해 저임금 노동으로 종업원을 착취하는 유니클로의 경제 수법과 유사하며, 그 때문에 디플레이션 경제를 정착시킬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지만,[116] 다나카 히데토미는 이에 대해, 애당초 아이돌 시장이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스케일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오히려 가네코가 결과와 원인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즉, AKB48의 경영 방법이 디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디플레이션이라는 경제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 AKB48의 전략이고, 그러므로 이것은 의당 경제적 약자인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성공 모델로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117]


AKB48 그룹의 구성원으로서, 일본 국내에는 나고야 시 사카에를 근거지로 하는 SKE48나 오사카 시 난바를 근거지로 하는 NMB48 등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디플레 컬처의 침투의 일환으로서, 젊은이들이 물가가 비싼 도쿄를 떠나 지방으로 돌아가려는 현상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AKB48 그룹은 케이팝 스타들의 한류 열풍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통해 해외에도 팬을 늘려가고 있으며, 그 결과로서 중화민국이나 인도네시아,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해외에도 계열 그룹이 탄생하는 등, 적극적인 글로벌화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로컬화와 글로벌화의 동시 진행[주 40] 이라는 부분에서, AKB48 그룹은 현대의 문화 소비에 있어서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118]


팬 커뮤니티


팬들의 소통 공간이 되기도 하는 전용극장

AKB48 그룹은 전용극장을 설치하여 공연을 진행하는 방법으로 아이돌과 팬의 거리를 좁히고 있지만, 이것은 동시에 팬끼리의 교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극장 앞 로비는 처음 만난 팬들이 잘 알고 지내는 계기가 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교류를 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119]


운영측은 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AKB48가 마악 데뷔하였을 무렵에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직접 AKB48 극장에 찾아가 팬과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스태프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의견을 전달받고 있다.[120] 그리고 운영 스태프 측의 경험이 부족했던 관계로, 초창기에는 티켓 판매나 추첨, 정렬등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까지 모두 팬들로부터 조언을 받아가며 진행하고 있었다.[12] 이와사키 나쓰미가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를 하고 있었을 때는, 그 자신의 인터넷 검색 실력을 활용하여 2채널이나 팬블로그 등에 포스팅된 그날그날의 공연에 대한 감상을 매일 정리하여 아키모토 야스시에게 보고하곤 했다. 이와 같이 쌓인 경험은 AKB48 그룹의 다른 자매 프로젝트에도 전해져서 활용되고 있다.[121]


AKB48는 공식 팬클럽 〈기둥의 모임〉을 2006년 8월 22일부터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회원 등록 제도에 허점이 있어서 얼마든지 유령회원의 가입이 가능했다. AKB48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를 악용한 극장티켓 암표상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고, 2011년 9월 30일부터는 일시적으로 팬클럽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문제점을 보완한 후에 같은 해 12월 8일부터 새 팬클럽 〈두 기둥의 모임〉을 발족시켰다.[122][123]


AKB48 극장 및 무대 의상

 이 부분의 본문은 AKB48 극장입니다.


"핑계 Maybe"의 의상을 입고 공연을 펼치는 AKB48

AKB48는 돈키호테 아키하바라 지점의 8층에 있는 전용극장 〈AKB48 극장〉을 홈 그라운드로써 활동하고 있다. 극장에는 무대와 관객 사이에 2개의 큰 기둥이 있어서 관객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진설계상 이 기둥을 치울 수는 없었고, 결국 기둥 안쪽에 대형 거울을 붙여 두는 것으로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있다. 즉, 왼쪽 날개 부분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멤버가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경우, 오른쪽 기둥의 안쪽에 부착된 거울로 비추어 보는 식이다.[15] AKB48의 극장지배인 도가사키 도모노부는 2005년 당시, 도쿄 여러 곳의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아다니며 라이브 극장 부지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상한 가게를 만드는 것 아니냐면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15] 그러다가 결국, 당시 시점에 점포가 들어서지 않아 출입금지 상태에 있었던 돈키호테 8층을 겨우 섭외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스테이지가 들어설 만한 장소와 객석이 들어설 만한 장소의 사이에, 앞서 말한 전체 건물의 내진설계상 도저히 치울 수 없는 기둥이 있었음에도, 다른 곳을 섭외할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최종적으로 낙점한 것이다.[15] 이 두 개의 기둥은 팬클럽의 명칭 〈기둥의 모임〉밎 〈두 기둥의 모임〉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124] 오늘날 이 기둥은 AKB48의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 활동 이력을 남기기 위해 두 기둥에 매년 핑크색 테이프를 한 줄씩 부착하고 있다.[125]


극장 공연은 2012년 현재에도 AKB48뿐만 아니라 AKB48 그룹을 구성하는 모든 계열 그룹들의 활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공연은 모두 오리지널 곡으로 진행되며, 오리지널 곡의 총 수는 2012년 2월 현재 400곡을 넘는다.[주 41] 그 중 거의 모든 곡의 작사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담당[주 42] 한다. 아키모토는 하나의 공연을 기획할 때마다 1천 곡 이상의 데모 테이프를 모아 며칠에 걸쳐 그것들을 들으면서 사용할 곡을 고르고 있다고 전해진다.[120]


AKB48의 모든 멤버가 착용하는 의상은 AKB48의 의상 담당자 지노 시노부[주 43] 가 거의 혼자서 디자인하고 있다. 각 멤버들의 성격과 체형까지 고려되어 개별적으로 제작되기에, 전체 의상은 1천벌 이상 존재한다. 한편 "핑계 Maybe"의 무대의상에 사용되었던 빨간 체크 무늬가 2010년에 들어서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패션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126] 실제 의상의 제작에는, 아키모토 야스시가 부학장으로 재직중인 교토 조형예술대학의 협조를 받고 있다.[78]


자선 활동

동일본 대진재 피재민 지원을 목적으로 하여, 팬들에게서 의연금을 모집하거나, 채리티 송이나 채리티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의 활동을 기획하며 실행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의연금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폭넓게 지지받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1년 5월부터 일본 적십자사의 활동을 홍보하는 〈적십자 오피셜 메신저〉에 임명되었다.[127][128]


동일본 대진재 이후, 2011년 5월부터, 피재민 지원을 위해 매달 한 번씩 도호쿠 지방 각지의 피재지에서 무료로 미니라이브와 악수회를 열고 있으며, 2012년 6월 현재까지 총 13회의 위문 공연이 있었다.[129][130] 원칙적으로는 공식 블로그나 팬 서비스를 위한 공개 스케줄표 등에는 위문 공연 개최지가 절대 공개되지 않으며, 앞서 인용한 두 개의 뉴스처럼 위문 공연이 있은 다음에 공개가 된다. 또한 매달 개최일도 항상 다르게 뒤섞고 있다.[주 44] 피재지 복구 사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포함한 위문 공연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직접 준비한다. 미니 라이브의 스테이지는 〈윙트럭〉[주 45] 으로 조달한다. 트럭의 크기 상, 한번에 스테이지에 오를 수 있는 멤버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의 공연 때마다 SKE48, NMB48와 같은 자매 그룹을 포함한 전체 멤버 중 6~7명이 교대로 참가하고 있다.


대중적 이미지와 콘셉트


AKB48 그룹 오냥코클럽을 프로듀스한 아키모토 야스시

AKB48가 등장하기 전, 아키모토 야스시의 프로듀스에 의해 데뷔한 일본의 여성그룹 아이돌로 1980년대에 활동한 오냥코클럽이 있다. 오냥코클럽의 특징은 〈아마추어 소녀를 오디션으로 선발하여, 50명 전후의 대규모 그룹으로 한다〉, 〈몇 명의 멤버를 뽑아 파생유닛으로 데뷔시킨다〉, 〈멤버와 동세대 정도의 젊은 팬을 주된 타겟으로 한다〉 등인데, 이는 AKB48 그룹에도 계승되고 있는 특징이다.[131] 한편, 오냥코클럽은 유야케 냔냔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활동의 중심으로 하였지만, AKB48 그룹은 전용 극장을 갖고 극장 공연을 주된 활동으로 하는 프로젝트인 점이 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오냥코클럽은 프로그램 시청률의 저하와 함께 데뷔 2년여만에 해산하였지만, AKB48 그룹은 2005년에 AKB48가 결성된 이래 7년째인 2012년 현재까지 일본 각지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132] 오냥코클럽은 멤버가 오디션에 합격하여 데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면서 무대 뒤편의 분위기를 시청자에게 공개하여 리얼리티를 어필하는 한편, 심사나 방송 내용을 운영측이 어느 정도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AKB48 그룹은 최소한 2009년 후반 무렵까지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는 영상 매체에 출연하고 있지 못하였지만, 그 대신 영상 미디어를 전혀 통하지 않은 채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콘셉트대로 극장 공연을 통해 팬과 아이돌 사이의 거리를 큰 폭으로 줄여나갈 수 있었다.[133][134]


오냥코클럽이 해산한 이후, 일본 가요계에서는 1997년부터 모닝구무스메가 출현하여 현재까지 활동하며 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몇년 전인 2005년에는 아키하바라의 지하 아이돌 문화를 배경으로 AKB48가 등장하였다.[135] AKB48의 초기 팬 중 대다수가 모닝구무스메(혹은 그보다 더 포괄적으로 헬로! 프로젝트)의 팬들로 추정되는데, 이로 인해 AKB48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서 모닝구무스메가 10년 이상 해산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136]


2009년경부터 일본에서는 AKB48 그룹이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는 카라나 소녀시대를 필두로 하는 한국의 케이팝 걸즈 유닛도 인기를 얻고 있다. AKB48 그룹이 자신들의 성장 과정을 팬과 공유하는 것을 콘셉트 중 하나로 하고 있는데 반해, 케이팝 여성 아이돌은 데뷔 때까지 최소한 수 년 간의 훈련 기간을 설정하고 있고, 이로 인해 데뷔 무대에서부터 이미 완벽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137] AKB48 그룹은 대체적으로 평범한 여자 아이 같은 외모를 갖고 있는데 반해, 케이팝 아이돌 유닛의 멤버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패션 모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스타일이 좋다.[138] 아키모토 야스시 또한, 케이팝 걸즈 유닛이 항상 일정하게 높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역시 프로페셔널답다고 평가하면서도, AKB48의 매력은 케이팝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타이밍에서도 똑같은 AKB48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하고 있다. 즉 멤버들은 그저 평범한 여자 아이들일 뿐이기에 언제나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지 못하고 항상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고 있고, 그러한 멤버가 수십명이 모여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139]


컬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는 〈아이돌은 시대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선도한다〉는 지론을 AKB48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미소라 히바리가 〈전후 일본의 고속 성장기〉를, 야마구치 모모에가 〈일본의 저성장 시대〉를, 마쓰다 세이코가 〈일본의 버블 시대 직후〉를 선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AKB48는 좀처럼 경기 불황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고 있는 오늘날 일본에서, 어떻게 즐거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테마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140]


대중문화적 비평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대중문화에 관한 비평에 있어서 세카이 계통, 서바이브 계통 혹은 배틀로얄 계통, 구키 계통[주 46] 와 같은 콘텐츠의 분류가 종종 진행되고 있는데, AKB48 그룹도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세카이 계통이란 1995년 이후부터 오타쿠계 문화를 중심으로 퍼진 심리주의적 경향으로, 〈주인공 주변의 좁은 인간관계가 세계적인 규모의 큰 사건에 직결된다〉는 특징을 갖는 작품에 주로 쓰여진다. 다나카 히데토미는, 팬들이 멤버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 그녀들의 시시콜콜한 사적인 이야기에 스스로를 연결시켜 생각하려 하는 행동을 세카이계적인 행동이라 보고 있다.[141]


서바이브 계통이란 비평가 우노 쓰네히로가 21세기 들어서 일본의 대중 문화에서 전반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한 작품 경향으로, 까탈스러우며 특권성을 갖지 못하는 개개인이 대립하고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142] 다나카 히데토미는 총선거로 대표되는 AKB48 그룹의 운영에 도입된 경쟁 원리는 우노 쓰네히로가 지적한 2000년대 특유의 시대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AKB48 그룹에는 세카이 계통의 요소와 서바이브 계통의 요소가 모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141] 이에 우노 쓰네히로는 서바이브 계통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공유될 만한 가치관이 존재해야 하는데, 요즘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공통의 가치관은 좀처럼 존재하기 힘들며, 그 대신 큰 규모의 게임이 존재할 수 있고 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배틀로얄 계통이라 볼 수 있다면서, AKB48 그룹의 멤버가 AKB48 그룹이라고 하는 큰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동원된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서바이브 계통보다는 배틀로얄 계통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143]


구키 계통이란 대체적으로 같은 성별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 경향으로, 우노 쓰네히로에 의하면 보통 그것은 이성의 소비자에게 지지되곤 하는데,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인 AKB48 그룹도 이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AKB48 그룹이라는 공동체에서는 블로그 등을 통해서 멤버간의 동성애에 가까운 관계를 연상시키는 행위가 남성 팬에의 서비스로서 제공되고 있고, 한편으로는 AKB48 그룹의 멤버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내용에 동성애 관계를 가미한 동인지가 만화 시장에서 여성팬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구키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의 2차적저작물 격의 수용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는 앞서 밝힌 것과 같은 경쟁 원리의 도입에 의해 구키 계통에 으레 있을법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망가뜨리면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는 면도 있다.[144][145][146]


캐릭터 소비


확실한 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총감독 다카하시 미나미

우노 쓰네히로와 사이토 다마키에 의하면, 팬들이 즐기고 있는 AKB48 그룹 멤버의 캐릭터[주 47] 는 그 운영 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령 오시마 유코가 변태 캐릭터라는 것이나, 다카하시 미나미가 썰렁 개그를 남발하는 캐릭터라는 것과 같이 각 멤버의 역할 분담이 대략적으로 되어 있어서, 멤버들의 인기 유지 여부는 외모, 스타일, 가창력이라는 요소보다도 이와 같은 캐릭터의 정립에 의존하고 있는 면이 있다.[147]


사이토 다마키에 의하면, 파생 유닛의 구성이나 선발 총선거라는 서열 매김에 의해 멤버의 캐릭터가 고정화되기 쉽고 또한 인식되기 쉬운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으며, 악수회와 같은 교류의 기회를 통해서 팬들은 자신들이 멤버의 캐릭터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소집단 내부에서의 (인기) 서열화와 캐릭터의 세분화가 동시 진행되고 있는 구조는, 현대 일본의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의 스쿨 카스트와 동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148][149]


우노 쓰네히로는 이 사이토 다마키의 의논을 되짚으면서, 앞서 밝힌 영상 매체를 통하지 않고 팬과 직접 교류하는 것으로써 운영측이 팬 커뮤니티의 반응을 참고하면서 AKB48 그룹 멤버의 캐릭터를 순환적으로 생성,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팬들은 극장 공연이나 블로그에서의 멤버들의 시시콜콜한 발언 등으로부터 얻어지는 멤버 사이의 친구관계나 성격과 같은 여러가지 정보를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에서 공유하고, 그렇게 공유한 정보들은 위키백과나 에케피디아[주 48], 2채널 같은 커뮤니티에 꾸준히 투고되어 쌓여 간다. 멤버들은 이와 같은 팬 커뮤니티의 반응을 참고하면서 각자의 캐릭터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갈 뿐만 아니라, 운영측이 멤버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배역 등에(가끔은 2차적저작물처럼 그것을 기반으로 살짝 응용이 가해진) 그 캐릭터를 반영하여, 그것을 팬이 재차 소비하는 것에 의해 원래의 캐릭터 인식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는 소위 〈캐릭터 소비에 있어서의 영구기관〉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150][151][152][153]


선정성 논란

AKB48 그룹의 뮤직 비디오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AKB48 그룹 중 AKB48의 "헤비 로테이션"의 뮤직비디오이다. 여기서는 모든 멤버들이 브래지어와 팬티, 란제리만 걸치고 있다. 또한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하고,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놀기도 한다. 생크림 케이크를 입으로 먹으면서 입 주위에 묻히고 뇌쇄적인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서로 껴안기도 하며, 심지어는 가볍게 입맞춤도 한다. 그리고 나란히 목욕을 하고 있기도 하다.[154] 이 뮤직비디오의 감독을 맡은 이는 니나가와 미카인데, 그녀는 AKB48가 여학생들에게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발하고 재미있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어필하고 싶었다고 설명하였다.[155]


AKB48는 모 소프트캔디의 CF를 촬영하였고, 그것은 2012년 3월 15일부터 방영되었다. 멤버들이 여고생 교복을 입고, 그 소프트캔디를 서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해 나가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비록 그녀들이 소프트캔디를 서로의 입술이 닿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치아로 물고 있었지만, 몇몇 시청자들은 이것이 동성애를 조장하고, 비위생적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며 항의하기도 했다.[154][156][157]


음악 스타일


결성 이후 중심 멤버로 활약해 온 이타노 토모미

AKB48 그룹의 노랫말을 크게 나누면 〈(여성 시점에서의) 연애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노랫말〉[주 49], 〈(남성 시점에서의) 연애나 청춘을 찬양하는 노랫말〉[주 50], 〈자기 암시적인 노랫말〉[주 51],〈학교 졸업에 관한 노랫말>[주 52], 이라는 네 가지 타입이 존재한다. 시기에 주목하면, 초기 단계에는 이제까지의 여성 아이돌의 노랫말로서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시점에서의) 연애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노랫말〉이 많았지만, 〈큰 목소리 다이아몬드〉가 발표될 무렵을 경계로 그 이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남성 시점에서의) 연애나 청춘을 찬양하는 노랫말〉과 〈자기 암시적인 노랫말〉의 2종류가 주류가 되어 갔다.[158][159] 그리고 매년 일본 학교들의 졸업식이 열리는 계절인 봄에는 여자 고등학교 (또는 중학교)의 졸업식과 관련된 싱글을 발표하는 경향이 있다. 오카지마 신시, 오카다 야스히로에 의한 서적 《그룹 아이돌 진화론》에 의하면, 여성 입장의 노랫말로부터 남성 입장의 노랫말로의 변천에는 팬층의 변화가 관련되어 있다. 즉, 종래의 일본 여성 아이돌의 팬이라 하면 누구나 그 첫인상으로서 패션 따위에 큰 관심이 없는 남성, 특히 아키하바라계 오타쿠를 떠올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AKB48 그룹의 경우에는 악수회나 극장 공연 등 아이돌과 팬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기회가 현저히 많아졌기 때문에 상황이 많이 다르다. 즉, 팬들은 아이돌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따라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젊은 남성팬이나 여성팬의 비율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에 호응하여, 연애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노랫말은 그다지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청춘관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거나 콘서트장에서 함성을 지르며 스테이지 위의 아이돌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노래[주 53]가 늘어나고 있다.[161]


우노 쓰네히로는 와타시(私)를 1인칭 주어로 쓰는 여성 입장의 노랫말에서 보쿠(僕)를 1인칭 주어로 쓰는 남성 입장의 노랫말로의 변천에 대해, 팬에게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의 동경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다만 팬과 힘을 합쳐 지금 이곳을 긍정하면서 오늘을 알차게 꾸미고자 하는 의식이 노랫말에 반영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주 54][163][164] 〈자기 암시적인 노랫말〉를 갖는 곡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AKB48 그룹이 하나의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기를 얻음에 따라, AKB48 그룹 자기 자신을 노래하는 것이 곧 사회를 노래하는 것과 같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작사가 아키모토 야스시가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162][165][166]


한편 아키모토 야스시의 노랫말들은 선정성 논란을 일으킬 만한 내용 때문에 해마다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AKB48 그룹의 멤버들은 앞서 밝혔듯 중고등학생이 대부분인지라 더욱 그렇다. 아키모토 야스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노랫말들은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한 방법이며, 듣는 이들이 이와 같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자극하기 위함이었다고 반박하였다.[167][168][169]


그러나 사이토 다마키는 아키모토 야스시에 의한 AKB48 그룹의 노랫말을 절망적인 황야와 같은 오늘날 제이팝 업계의 희망의 등불이라 평가하며,[149] 〈양키[주 55] 적인 성격〉이 들어간 요소가 노랫말에 심겨져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AKB48 그룹 멤버에 주목해보면, 오타쿠처럼 보이는 와타나베 마유나, 양키처럼 보이는 이타노 도모미의 양자가 모두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밸런스가 잡혀 있다. 거기다가 아키모토 그 자신 또한 오타쿠적인 성격과 양키적인 성격을 모두 갖는 특이한 타입의 인간이라서, "마지스카 로큰롤"이나 "Beginner"에는 양키 특유의 찰나주의(刹那主義),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적인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사실 아키모토 자신은 양키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일부러 의식적으로 그런 성격인 척을 하면서 가사를 쓰는 것 같이도 느껴진다는 면에서, 그 밸런스가 절묘하다고 평가하고 있다.[170]


각본가이자 작사가인 사토 히로시는, 마찬가지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오냥코클럽의 노래에서는 말장난처럼 가볍게 쓰여진 노랫말이 많았지만, AKB48 그룹의 노랫말은 주관적이고 직설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르다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자기 성찰을 장려하는 노랫말이, AKB48 그룹 멤버 개개인에의 무의식적인 인격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하고 있다.[171]


AKB48 그룹의 구성원 확대


SKE48 팀KII의 공연 장면

2008년 여름에는 아이치 현 나고야 시의 사카에의 전용극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SKE48가, 2009년 여름에는 아키하바라 AKB48 극장을 근거지로 하는 두 번째 자매 프로젝트로서 20세 이상의 멤버들로만 구성된 SDN48가, 2010년 가을에는 오사카 부 오사카 시 난바의 전용극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NMB48가, 2011년 가을에는 규슈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하카타의 전용극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HKT48가 각각 탄생하였다. 이들 중 SDN48는 2012년 봄에 멤버 전원 졸업의 형태로 해산하였다. 2015년도에는 니이가타 현 니이가타 시의 전용극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NGT48가 탄생하였다. 2016년 10월에 세토우치 지방을 기점으로 활동할 예정인 STU48가 2017년 여름에 결성하는 것을 발표했다.


이들 자매 프로젝트의 멤버들 중 일부는 원소속팀의 극장 공연 및 싱글 활동과 더불어, AKB48의 싱글 선발 멤버로도 차출되고 있다. 특히 43번째 싱글 "너는 멜로디"에서의 미야와키 사쿠라처럼, 원 소속팀을 AKB48로 두지 않는 자매 프로젝트의 멤버가 단독 센터 포지션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이전인 2012년 3월부터 겸임 제도가 활용되고 있었다. 최초의 겸임 멤버는 SKE48의 마츠이 쥬리나와 NMB48의 와타나베 미유키였다. 2014년 2월부터 AKB48의 멤버 또한 타 그룹에 겸임을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멤버로서는 AKB48 팀B의 카시와기 유키(NGT48 팀NIII 겸임)가 있다.


한편, 해외에서도 2011년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하는 JKT48,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하이 시를 거점으로 하는 SNH48[172]를 결성되었다. 2016년 3월에 중화민국 타이페이를 거점으로 하는 TPE48, 필리핀 마닐라를 거점으로 하는 MNL48, 태국 방콕을 거점으로 하는 BNK48를 발족하였다. 동년 4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 시를 거점으로 하는 BEJ48, 광둥 성 광저우 시를 거점으로 하는 GNZ48, 선양 시를 거점으로 하는 SHY48 등 SNH48의 자매 그룹으로서 결성되었다. 다만, AKB48 그룹과 무관하다.


또한, AKB48 그룹의 구성원이 아닌, 공식 라이벌 격인 노기자카46가 데뷔하여 활동 중이기도 하며 멤버 이코마 리나가 교환 유학생으로 AKB48 팀B의 멤버로 활동했으나, 겸임해제되었다.


구성원

 AKB48의 현 구성원은 AKB48의 그룹 구성#현 구성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AKB48의 전 구성원은 AKB48의 그룹 구성#전 구성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AKB48의 정규 멤버는 원칙적으로 팀A, 팀K, 팀B, 팀4, 팀8의 5개의 팀 중, 반드시 어느 하나에 소속하도록 되어 있다. AKB48 극장에서의 극장 공연은 원칙적으로 팀 단위로 진행된다. 정규 멤버가 아닌 연구생 멤버도 있다. 연구생은 백댄서 혹은 정규 멤버의 언더[주 56] 로서 공연에 출연한다. 그러다보니 연구생이 공연 멤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도 있다.


당초 결성 당시는 멤버 전원이 office48 소속이었으나, 매니지먼트 및 인지도 강화를 위해서, 일부 멤버들이 다른 소속 사무소로 이적하기 시작했다. 현재 오오타 프로덕션, 프로덕션 오기, 호리프로, 와타나베 프로덕션, 플레이브 엔터테인먼트 등에 속해 있다. 멤버들의 소속 사무소 현황에 관해서는 AKB48의 그룹 구성#소속 사무소에서 다루고 있다.


멤버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오디션이 활용되는데, 여기서 스태프들과의 회의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합격자를 결정하고 있다. 멤버를 고르는 포인트로서는, 정통파 미소녀만을 고르는 것이 아니고, 팬들의 기호의 다양함에 맞추어 성격과 외모까지 되도록 폭넓게 고르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로 인해, 학교의 한 학급과도 같은 리얼리티를 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120] 오디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AKB48의 그룹 구성#오디션에서 다루고 있다.


결성 직후부터 현재까지, 많은 멤버들이 졸업 혹은 사퇴의 형식으로 그룹을 이탈하였다. 이들에 관해서는 AKB48의 그룹 구성#전 구성원에서 다루고 있다.


한국 진출

2006년부터 사사에 sasae.kr 라는 소수정예팬 모임이 있었다. 2008년 네이버 팬카페 사쿠라학원(포티에잇월드) cafe.naver.com/sakurahubuki 가 생겼는데 포티에잇월드 운영진이였다가 운영진에서 물러난 시기인 2014년 행사를 개최하는데 한국지사 대표인 조영욱도 참석했다. 그런데 포티에잇월드 내 소규모 모임인 사사에 에서 관계자석표를 받은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게 된다. 순수한 팬들의 기획인지 전략적인 의도인지 의심되는 행사였지만 사사에가 개최한 행사는 이로인해 중지되었고 한국 진출은 사사에가 주도했었는데 이로 인해 AKB48의 한국 진출은 실패한다.


음반 목록

 이 부분의 본문은 AKB48의 관련 작품#음반입니다.

베스트 앨범

Set List: Greatest Songs 2006-2007《Set List: Greatest Songs 2006-2007》 (2008)

神曲たち《가미쿄쿠타치》 (2010)

0と1の間《0토1노아이다》 (2015)

정규 앨범

ここにいたこと《고코니이타코토》 (2011)

1830m《1830m》 (2012)

次の足跡《쓰기노아시아토》 (2014)

ここがロドスだ、ここで跳べ!《고코가로도스다, 코코데토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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